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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추천 ♔ 야마토3게임 ♔┯ 17.reg936.top ™25년 전 한국에 입국해 탈북 교사들 처우 개선을 위해 일해 온 최영실 통일사랑교육협의회 회장.
지금까지 한국에 온 탈북민 3만4000여 명 중에는 교사 출신이 300명을 넘는다. 하지만 이들 중 정식 임용고시를 통과해 교사가 된 사례는 전무하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탈북민 수십 명은 학력과 경력을 인정받고 의사 국가시험을 통과해 의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사로 일하는 것은 의사가 되기보다 훨씬 장벽이 높다. 남북 교육 과정이 그만큼 판이하다는 사정이 있지만, 아직 우리 학부형들이 탈북민 선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도 이유다.
북한에서 15년 동안 교사로 농협중앙회새희망홀씨 일한 최영실 통일사랑교육협의회 회장도 25년 전 한국에 와서 그 장벽을 넘어 보려고 애썼지만 끝내 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교사 출신 탈북민들이 나름의 전문성을 살려 살 수 있는 우회로를 만들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북한에서 교사는 인기 직업입니다. 남북 교육 과정이 많이 다르고 인문계 교사 출신은 ‘재활용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 정부대출기관 지만, 이공계 출신 교사 중 상위 10%는 재교육시켜 기회를 준다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 통일 후 남북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예행연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국에서 25년째 살고 있는 최 씨는 올해 환갑을 맞았다. 노후 준비도 다 했다. 10세 때 자신과 함께 한국에 온 아들도 훌륭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학자금대출 서류제출방법 후배 북한 이탈 주민과 탈북 교사들의 멘토로 현역에서 뛰고 있다.
최영실 씨가 서울시 노원구 용동초등학교에서 통일 전담 교육사로 일하던 시절.
● 19세 소학교 선생님
최 씨 고향은 함경북도 경원 주택대출이자연말정산 군이다. 북한은 1977년 경원군에 새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2005년 다시 경원군으로 바꾸었다.
1965년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철도 역장이었고 모친도 여맹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경원읍에 1930년 개통한 철도역 ‘역장 집 딸’은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다 커서야 부친이 일본 도쿄 유학생 출신이고 어 주택담보대출원리금균등상환 머니도 전남 무안 출신이란 것을 알았다. 부모는 숙청당하지 않으려고 북한 최북단에서 숨을 죽여 살았던 것이다.
최 씨는 북한 베이비붐 세대다. 시골이지만 인구가 많은 탄광 지역이어서 한 학년 학생이 500명을 넘었다. 학급 정원도 65명이나 됐다.
1981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졸업생 500명 중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간 졸업생은 8명밖에 없었다. 중앙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사범대(중학교 교사 양성)나 교원대(인민학교 교사 양성) 지방 의대가 최대치였다. 신분이 세습되는 북한에서는 시골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출세 길이 막히는 것이다.
사대나 교대를 보내는 이유도 시골 지역 선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직업을 결정하는 북한에선 개인 능력으로 이 굴레를 벗기는 불가능했다.
최 씨는 1984년 19세로 3년제 교원대학을 졸업하고 경원에 돌아와 인민학교 선생님이 됐다. 그때부터 13년 동안 교사로 있었다.
1990년엔 군당 고위 간부 집안 아들과 결혼했고, 그해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은 큰 기업소 자재 담당 자리를 얻어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돈도 많이 벌어 왔다. 그 덕에 1990년대 초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2016년 서울 근교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최영실 씨.
● 두 차례나 보위부에 수감
1997년 12월 남편이 탈북했다. 식량 구입하러 간다고 떠난 남편은 중국으로 가고 싶다는 여성 3명을 데려갔다. 그게 화근이었다. 이 중 한 여성이 중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체포돼 북송된 뒤 보위부에 실토했다.
보위부가 최 씨 집에 찾아왔다. 처음엔 “남편 어디로 갔냐”고 따지다 최 씨를 9일 동안 보위부 구류장에 잡아 넣고는 “인신매매로 돈을 번 게 틀림없으니 실토하라”고 추궁했다. 최 씨는 “남편이 했던 일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실제로 그랬다. 보위부는 결국 그를 풀어 줬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보위원들은 남편을 잡기 위해 그의 집에서 잠복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6명이 교대 근무를 섰고, 낮에도 2명씩 집에 와 있었다. 보위부와의 ‘동거’는 4개월이나 이어졌다.
온 동네에 “최 선생 집에 보위부가 잠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이듬해 봄, 두만강으로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니 그제야 보위부는 철수했다. 국경인 두만강은 강폭이 넓은데, 얼음까지 떠내려 오면 도강이 불가능했다.
한숨 돌릴까 싶었는데, 잘 알고 지내는 여성이 집에 와서 “(당신) 남편 심부름으로 왔으니 두만강 변에 가서 돈을 넘겨받자”고 했다. 하지만 최 씨는 보위부의 함정인 듯싶어 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보위부 스파이였다. 최 씨가 함정에 빠지지 않자 보위부는 다른 수법을 썼다.
1998년 5월 보위부는 다짜고짜 그를 다시 잡아 인신매매 방조범이란 누명을 씌웠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파리를 새로 둔갑시키는 보위부에 통할 리 없었다. 그때 취조를 받으며 쇠꼬챙이로 맞은 손등 상처는 27년이 지난 지금도 흉터로 남아 있다.
2017년 가을, 학교 교직원 연수하러 간 곳에서 최영실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재산 다 뺏기고 추방되다
수감 한 달이 지났을 때 최 씨는 낡은 화물차에 태워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쉼 없이 달린 차는 어느 산골 돼지 축사 앞에 멈춰 섰다. 좀 있더니 다른 차가 와서는 그의 8세 아들과 이불 몇 채, 옷 약간을 내려놓았다.
“너는 추방됐으니 오늘부터 여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
이 말을 남기고 보위부 사람들은 떠났다. 기가 막혔다. 집에 가 보지도 못한 채 어린 아들과 함께 추방된 것이다. 집에 있던 TV, 자전거, 오디오 같은 비싼 가전제품과 가구는 누가 빼돌렸는지 알 수도 없었다. 남편이 없어지기 전에 사놓은 3년치 식량과 땔나무도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경원읍에서 차로 두 시간이나 떨어진 용현이라는 농촌이었다. 농촌 부락에서도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였다. 앞이 막막했다. 선생님에서 졸지에 돼지치기 신세가 됐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였다. 뼈만 남은 농촌 주민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겨우 걸어 다녔다. 내일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먹을 것도 없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밤에는 들짐승 우는 소리가 무서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나진에 살던 언니가 소식을 듣고 일주일 만에 찾아왔다. 장사를 해서 나름 잘 살던 언니는 동생 처지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고난의 행군 시기엔 행정력도 붕괴돼 관리자나 책임자에게 뇌물만 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언니가 디젤유와 농사용 비닐 등을 잔뜩 싣고 와서 “동생이 많이 아프니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하자 농장 관리위원장이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최 씨는 탈출했다.
나진 언니 집으로 간 그에게 언니는 북한 돈 2만 원을 빌려주면서 장사를 시작하라고 했다. 당시 2만 원은 큰돈이었다. 하지만 교사만 한 터라 장사할 줄을 몰랐다. 아는 지역이라곤 고향밖에 없었다.
장사할 생각으로 몰래 고향 친구 집을 찾아갔다. 친구는 최 씨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줄 알았는데 정말 기적이라며 반가워했다. 친구를 통해 경원에서 생산된 식량을 구입해 차로 청진으로 싣고 가서 두 배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장사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서 자본과 시장을 배우게 됐다. 이후 미국 달러를 교환해 주는 일도 했고, 여러 가지 물건을 싣고 다른 도시로 가서 도매도 했다. 장사하며 사귄 친구 4명과 함께 큰 차를 빌려 거래 규모를 늘렸더니 이윤도 늘어났다. 그 4명 중 3명이 한국에 왔다.
2016년 일본 여행을 하는 최영실 씨.
● 아들과 함께 탈북
2000년 8월 어느 날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들이 사진 한 장을 건넸다. 벽돌건물 앞에서 찍은 남편 사진이었다. 그 건물이 하나원 건물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알았다.
사진 뒷면엔 아무 설명 없이 그와 아들의 생년월일만 적혀 있었다. 문뜩 남편이 사라지기 전에 남긴 말이 떠올랐다.
“생년월일을 사진 뒷장에 적어 보내면 내가 인편으로 보낸 건 줄 알아라.”
당시엔 남편이 중국으로 탈북하려 한다는 것도 모를 때여서 무슨 말인가 했는데, 사진을 보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낮에 어떤 여인이 와서 엄마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인은 “곧 다시 오겠으니 엄마 보고 장사 나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해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때부터 장사를 접고 그 여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포기할까 싶을 때 여인이 나타났다. 당시 북부 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해 길이 다 끊겨서 늦게 온 것이다.
“남편이 1000달러를 보내 준다는데, 나보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합디다”라는 여인의 말에 최 씨는 아들과 함께 바로 떠났다. 엄청나게 큰돈이기도 했지만, 다시 남편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 여인과 도착한 곳은 두만강 상류에 해당하는 회령의 깊은 산골이었다.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하니 여인의 말이 바뀌었다.
“국경은 위험해서 (남편이) 강을 넘어올 수 없으니 중국에 와서 돈을 받아 가라고 합니다. 두만강을 무사히 넘어갔다 오도록 다 준비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밤에 국경경비대원이 나타났다. 그 군인은 최 씨와는 밧줄로 몸을 묶고, 최 씨 아들은 어깨에 목마를 태우고 강을 건넜다. 2000년 10월이었다.
2020년 미국에 초청받아 통일 교육을 진행하던 최 씨가 캐나다를 방문해 공원을 찾았다.
● 탈북 3일 만에 도착한 한국
강을 넘자마자 그 여인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었다. 거의 3년 만에 듣는 남편 목소리였다.
“추방됐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어.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 아들과 함께 내가 오라는 곳까지 오면 우리가 함께 안전하게 잘살 수 있어.”
통화를 마치니 승용차가 나타났다. 차는 최 씨와 아들을 연길의 어느 공안원 집에 내려 주었다. 하지만 남편은 없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
“실은 대련이란 곳에 있어. 그곳까지 오면 돼.”
다음날 공안이 최 씨 모자를 데리고 나가 사진을 찍게 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무사히 갈 수 있게 하는 과정이라고 하니 그대로 믿었다. 이후 심양이란 곳에 가야 한다며 모자를 기차에 태웠다. 밤새 달려 심양역에 도착하니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성은 비행기를 한 번만 더 타면 남편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며 공항으로 데려갔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몰라도 무사히 심사대를 통과해 비행기에 탔다. 한 시간 남짓 지나자 비행기가 착륙했다. 그곳은 중국이 아닌 인천공항이었다. 최 씨는 한국으로 오는 줄도 몰랐다.
“그땐 남편이 한국으로 오라고 했으면 안 갔을 것 같아요. 북한에 있는 부모 형제 안위가 걱정돼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남편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고, 중국에 좀 있다가 돈을 갖고 북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내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국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죠.”
최 씨가 두만강을 넘어 한국까지 도착한 기간은 단 사흘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렇게 빨리, 아무 고생 없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누구나 그랬듯이 최 씨도 조사를 받고 하나원에 갔다. 한국까지 온 것은 본인 뜻이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한국에서 잘 정착하고자 결심했다.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연구원 시절인 2011년 최영실 씨가 북한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 전혀 다른 한국 생활
2001년 3월 최 씨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한 임대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한국 아파트 생활은 북한 가정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족도가 높았다.
북한에선 한겨울에 물을 길러 새벽부터 다녔는데 여기선 항상 더운물이 콸콸 쏟아졌고, 언제든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집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북한에서처럼 땔감 걱정, 전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밸브만 돌리면 새파란 불이 올라와 음식을 만들 수 있고, 입식 부엌이 아니어서 더 좋았다. 밖에 나가면 슈퍼마켓이 있어 언제라도 쌀이든 부식물이든 살 수 있고 심지어 겨울에 과일도 살 수 있었다.
그가 왔을 당시 국내 입국 탈북민은 1000명 남짓에 불과했다. 특히 북한에서 교사를 하다가 온 탈북민은 희소했다. 그 덕분에 최 씨는 통일교육원 소속 강사로 위촉돼 경찰청, 국정원, 각급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북한 실상을 증언했다.
몇 년 동안 위촉 전문 강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를 알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도 점점 안정돼 행복감은 커졌다. 하지만 북한 관련 강의를 가서 질의응답 시간에 고난도 질문을 받으면 “여기 사람들은 참 많이 알고 있는데, 내 지식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대학원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2007년 이화여대 석사 과정에 입학해 2010년에 석사가 됐다. 곧바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해 2013년에 수료했다. 해가 갈수록 입국하는 탈북민도 늘어나면서 강사로 계속 살 순 없었다.
2009년 9월 그는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탈북민이 1년에 2500명을 넘자 한국교육개발원도 북한 출신 청소년 교육에 신경을 쓰기 시작해 탈북민 교육자 출신을 뽑은 것이었다.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최 씨가 북한이탈주민 적응 실태 조사 현황을 살펴보니 탈북 청소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북한 교사 출신들이 한국에서는 경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을 재교육해 탈북 청소년을 이끌어 주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는 ‘NK교사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NK교사 아카데미는 북한 교사 출신 탈북민에게 한국 교육 과정을 초급 및 심화 과정으로 나눠 1년 동안 가르친다. 교육을 마친 이들이 탈북 학생들의 방과 후 학습 지도 및 학교 적응 상담을 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울 강서구나 노원구처럼 탈북민이 밀집한 임대 아파트 주변 학교에는 탈북민 자녀들이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탈북민 학생들도 생소한 한국 학교 과정을 따라가기 힘들어한 만큼 한국 교사들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탈북 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특히 탈북민 학부형을 만나면 상담하기 난감한 상황이 많이 생겼다.
2010년 이화여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최영실 씨.
● 현장 누비는 통일전담교육사
최 씨는 교육부에 탈북민 학생이 10명 이상 있는 학교엔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를 채용하도록 정책 제언을 했다. 교육부도 그 필요성을 인정해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방과 후 탈북민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같은 북한 출신이라 탈북민 학부형들 만족도가 높았다.
탈북 학생은 한부모 가정인 경우가 많다. 또 부모도 한국 정착이 어려워서 아이들을 돌볼 경황이 없을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잘 돌봐 주는 것도 코디네이터 몫이었다.
당시 한국에 탈북민 학생이 10명 이상 다니는 22개 학교에 NK교사 아카데미 1년 과정을 마친 탈북 교사들을 선발해 보냈다. 비록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탈북 교사들이 자신의 경력을 활용하고, 탈북 청소년도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게 하는 것이 최 씨의 목표였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통일 교육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12년 탈북민 정착을 담당하는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정식 출범하면서 교육부 소속이던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남북하나재단 소속 통일전담교육사로 소속과 명칭이 바뀌었다.
최 씨는 2013년 5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나와 통일전담교육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한 노원구 용동초등학교에는 탈북민 학생이 43명이나 있었다.
탈북하면서 온갖 고생을 겪다 보니 많은 탈북민 학생이 기초 학력 부진과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보였다. 이 아이들에게 방과 후 학습과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담임선생님과 탈북민 학부형 사이 소통을 중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최 씨는 자기 일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학교 교사들에게 탈북 학생 및 가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강의를 했고, 탈북 학생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탈북 학생 개개인에게 맞춤인 교육을 통해 꿈과 끼를 키워 줘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초등학교에서 2020년 3월까지 7년 동안 일했다.
서울 노원구 용동초등학교에서 통일전담교육사로 일하던 시절의 최영실 씨.
● 통일을 내다본다면…
통일전담교육사를 그만둔 그는 탈북민 교사 출신들이 주로 가입된 법인 통일사랑교육협의회를 설립했다.
현재는 회원 100명이 넘는 비영리단체로 성장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탈북민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국방부 안보 교육 용역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약 3년간, 연 500회 이상 탈북민 강사가 군부대를 돌며 안보 교육 강의를 진행했다.
올해 35세가 된 최 씨의 아들은 ‘인서울’ 대학을 나와 현재 제주도의 한 호텔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조만간 결혼할 예정이다.
최 씨가 탈북민 교사 모임인 통일사랑교육협의회를 만든 것은 먼저 한국에 와서 정착한 교사 출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바람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은 지금도 북한에서의 경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아쉬운 대목이다.
그가 볼 땐 북한에서 수학 물리 화학 생물 같은 기초 과학을 가르쳤던 교사 중에는 수재도 꽤 많이 있다. 학교 졸업생 15% 정도만 대학 및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해 교사가 됐다는 것 자체가 인재란 의미다.
한국 교육 과정을 재교육시키면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지금까지 재교육 과정도, 임용고시 기회도 없는 게 안타깝다.
“통일이 되서 북한 교육 과정을 짧은 기간에 싹 바꾸다 보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교육자 수만 명을 갑자기 양성할 수도 없으니 북한에 있는 교사들을 재교육해서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한다면 우리 정부도 북한 출신 교육자들을 재교육해 활용하는 예행연습을 해 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는 유치원 교사 출신까지 포함해 북한 교육자 출신이 300명이 넘습니다. ‘미리 온 통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중 한 명도 자신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많은 탈북민이 한국에서 25년을 살아 온 그에게 “정착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선 운전면허를 따세요. 자격증도 가능한 많이 따야 합니다. 그래야 선택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늘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책임감과 인성입니다. 그걸 갖춘 사람들은 빨리 정착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겉돌며 삽니다.”
그의 나이 60세. 인생의 황혼에 들어섰지만 힘닿는 한 탈북민의 맏언니처럼, 엄마처럼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 탈북민 사회에서 그가 가장 남기고 싶은 삶의 흔적은 하나뿐이다.
“최영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학교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금까지 한국에 온 탈북민 3만4000여 명 중에는 교사 출신이 300명을 넘는다. 하지만 이들 중 정식 임용고시를 통과해 교사가 된 사례는 전무하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탈북민 수십 명은 학력과 경력을 인정받고 의사 국가시험을 통과해 의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사로 일하는 것은 의사가 되기보다 훨씬 장벽이 높다. 남북 교육 과정이 그만큼 판이하다는 사정이 있지만, 아직 우리 학부형들이 탈북민 선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도 이유다.
북한에서 15년 동안 교사로 농협중앙회새희망홀씨 일한 최영실 통일사랑교육협의회 회장도 25년 전 한국에 와서 그 장벽을 넘어 보려고 애썼지만 끝내 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교사 출신 탈북민들이 나름의 전문성을 살려 살 수 있는 우회로를 만들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북한에서 교사는 인기 직업입니다. 남북 교육 과정이 많이 다르고 인문계 교사 출신은 ‘재활용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 정부대출기관 지만, 이공계 출신 교사 중 상위 10%는 재교육시켜 기회를 준다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 통일 후 남북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예행연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국에서 25년째 살고 있는 최 씨는 올해 환갑을 맞았다. 노후 준비도 다 했다. 10세 때 자신과 함께 한국에 온 아들도 훌륭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학자금대출 서류제출방법 후배 북한 이탈 주민과 탈북 교사들의 멘토로 현역에서 뛰고 있다.
최영실 씨가 서울시 노원구 용동초등학교에서 통일 전담 교육사로 일하던 시절.
● 19세 소학교 선생님
최 씨 고향은 함경북도 경원 주택대출이자연말정산 군이다. 북한은 1977년 경원군에 새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2005년 다시 경원군으로 바꾸었다.
1965년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철도 역장이었고 모친도 여맹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경원읍에 1930년 개통한 철도역 ‘역장 집 딸’은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다 커서야 부친이 일본 도쿄 유학생 출신이고 어 주택담보대출원리금균등상환 머니도 전남 무안 출신이란 것을 알았다. 부모는 숙청당하지 않으려고 북한 최북단에서 숨을 죽여 살았던 것이다.
최 씨는 북한 베이비붐 세대다. 시골이지만 인구가 많은 탄광 지역이어서 한 학년 학생이 500명을 넘었다. 학급 정원도 65명이나 됐다.
1981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졸업생 500명 중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간 졸업생은 8명밖에 없었다. 중앙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사범대(중학교 교사 양성)나 교원대(인민학교 교사 양성) 지방 의대가 최대치였다. 신분이 세습되는 북한에서는 시골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출세 길이 막히는 것이다.
사대나 교대를 보내는 이유도 시골 지역 선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직업을 결정하는 북한에선 개인 능력으로 이 굴레를 벗기는 불가능했다.
최 씨는 1984년 19세로 3년제 교원대학을 졸업하고 경원에 돌아와 인민학교 선생님이 됐다. 그때부터 13년 동안 교사로 있었다.
1990년엔 군당 고위 간부 집안 아들과 결혼했고, 그해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은 큰 기업소 자재 담당 자리를 얻어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돈도 많이 벌어 왔다. 그 덕에 1990년대 초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2016년 서울 근교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최영실 씨.
● 두 차례나 보위부에 수감
1997년 12월 남편이 탈북했다. 식량 구입하러 간다고 떠난 남편은 중국으로 가고 싶다는 여성 3명을 데려갔다. 그게 화근이었다. 이 중 한 여성이 중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체포돼 북송된 뒤 보위부에 실토했다.
보위부가 최 씨 집에 찾아왔다. 처음엔 “남편 어디로 갔냐”고 따지다 최 씨를 9일 동안 보위부 구류장에 잡아 넣고는 “인신매매로 돈을 번 게 틀림없으니 실토하라”고 추궁했다. 최 씨는 “남편이 했던 일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실제로 그랬다. 보위부는 결국 그를 풀어 줬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보위원들은 남편을 잡기 위해 그의 집에서 잠복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6명이 교대 근무를 섰고, 낮에도 2명씩 집에 와 있었다. 보위부와의 ‘동거’는 4개월이나 이어졌다.
온 동네에 “최 선생 집에 보위부가 잠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이듬해 봄, 두만강으로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니 그제야 보위부는 철수했다. 국경인 두만강은 강폭이 넓은데, 얼음까지 떠내려 오면 도강이 불가능했다.
한숨 돌릴까 싶었는데, 잘 알고 지내는 여성이 집에 와서 “(당신) 남편 심부름으로 왔으니 두만강 변에 가서 돈을 넘겨받자”고 했다. 하지만 최 씨는 보위부의 함정인 듯싶어 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보위부 스파이였다. 최 씨가 함정에 빠지지 않자 보위부는 다른 수법을 썼다.
1998년 5월 보위부는 다짜고짜 그를 다시 잡아 인신매매 방조범이란 누명을 씌웠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파리를 새로 둔갑시키는 보위부에 통할 리 없었다. 그때 취조를 받으며 쇠꼬챙이로 맞은 손등 상처는 27년이 지난 지금도 흉터로 남아 있다.
2017년 가을, 학교 교직원 연수하러 간 곳에서 최영실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재산 다 뺏기고 추방되다
수감 한 달이 지났을 때 최 씨는 낡은 화물차에 태워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쉼 없이 달린 차는 어느 산골 돼지 축사 앞에 멈춰 섰다. 좀 있더니 다른 차가 와서는 그의 8세 아들과 이불 몇 채, 옷 약간을 내려놓았다.
“너는 추방됐으니 오늘부터 여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
이 말을 남기고 보위부 사람들은 떠났다. 기가 막혔다. 집에 가 보지도 못한 채 어린 아들과 함께 추방된 것이다. 집에 있던 TV, 자전거, 오디오 같은 비싼 가전제품과 가구는 누가 빼돌렸는지 알 수도 없었다. 남편이 없어지기 전에 사놓은 3년치 식량과 땔나무도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경원읍에서 차로 두 시간이나 떨어진 용현이라는 농촌이었다. 농촌 부락에서도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였다. 앞이 막막했다. 선생님에서 졸지에 돼지치기 신세가 됐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였다. 뼈만 남은 농촌 주민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겨우 걸어 다녔다. 내일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먹을 것도 없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밤에는 들짐승 우는 소리가 무서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나진에 살던 언니가 소식을 듣고 일주일 만에 찾아왔다. 장사를 해서 나름 잘 살던 언니는 동생 처지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고난의 행군 시기엔 행정력도 붕괴돼 관리자나 책임자에게 뇌물만 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언니가 디젤유와 농사용 비닐 등을 잔뜩 싣고 와서 “동생이 많이 아프니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하자 농장 관리위원장이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최 씨는 탈출했다.
나진 언니 집으로 간 그에게 언니는 북한 돈 2만 원을 빌려주면서 장사를 시작하라고 했다. 당시 2만 원은 큰돈이었다. 하지만 교사만 한 터라 장사할 줄을 몰랐다. 아는 지역이라곤 고향밖에 없었다.
장사할 생각으로 몰래 고향 친구 집을 찾아갔다. 친구는 최 씨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줄 알았는데 정말 기적이라며 반가워했다. 친구를 통해 경원에서 생산된 식량을 구입해 차로 청진으로 싣고 가서 두 배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장사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서 자본과 시장을 배우게 됐다. 이후 미국 달러를 교환해 주는 일도 했고, 여러 가지 물건을 싣고 다른 도시로 가서 도매도 했다. 장사하며 사귄 친구 4명과 함께 큰 차를 빌려 거래 규모를 늘렸더니 이윤도 늘어났다. 그 4명 중 3명이 한국에 왔다.
2016년 일본 여행을 하는 최영실 씨.
● 아들과 함께 탈북
2000년 8월 어느 날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들이 사진 한 장을 건넸다. 벽돌건물 앞에서 찍은 남편 사진이었다. 그 건물이 하나원 건물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알았다.
사진 뒷면엔 아무 설명 없이 그와 아들의 생년월일만 적혀 있었다. 문뜩 남편이 사라지기 전에 남긴 말이 떠올랐다.
“생년월일을 사진 뒷장에 적어 보내면 내가 인편으로 보낸 건 줄 알아라.”
당시엔 남편이 중국으로 탈북하려 한다는 것도 모를 때여서 무슨 말인가 했는데, 사진을 보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낮에 어떤 여인이 와서 엄마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인은 “곧 다시 오겠으니 엄마 보고 장사 나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해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때부터 장사를 접고 그 여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포기할까 싶을 때 여인이 나타났다. 당시 북부 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해 길이 다 끊겨서 늦게 온 것이다.
“남편이 1000달러를 보내 준다는데, 나보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합디다”라는 여인의 말에 최 씨는 아들과 함께 바로 떠났다. 엄청나게 큰돈이기도 했지만, 다시 남편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 여인과 도착한 곳은 두만강 상류에 해당하는 회령의 깊은 산골이었다.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하니 여인의 말이 바뀌었다.
“국경은 위험해서 (남편이) 강을 넘어올 수 없으니 중국에 와서 돈을 받아 가라고 합니다. 두만강을 무사히 넘어갔다 오도록 다 준비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밤에 국경경비대원이 나타났다. 그 군인은 최 씨와는 밧줄로 몸을 묶고, 최 씨 아들은 어깨에 목마를 태우고 강을 건넜다. 2000년 10월이었다.
2020년 미국에 초청받아 통일 교육을 진행하던 최 씨가 캐나다를 방문해 공원을 찾았다.
● 탈북 3일 만에 도착한 한국
강을 넘자마자 그 여인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었다. 거의 3년 만에 듣는 남편 목소리였다.
“추방됐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어.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 아들과 함께 내가 오라는 곳까지 오면 우리가 함께 안전하게 잘살 수 있어.”
통화를 마치니 승용차가 나타났다. 차는 최 씨와 아들을 연길의 어느 공안원 집에 내려 주었다. 하지만 남편은 없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
“실은 대련이란 곳에 있어. 그곳까지 오면 돼.”
다음날 공안이 최 씨 모자를 데리고 나가 사진을 찍게 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무사히 갈 수 있게 하는 과정이라고 하니 그대로 믿었다. 이후 심양이란 곳에 가야 한다며 모자를 기차에 태웠다. 밤새 달려 심양역에 도착하니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성은 비행기를 한 번만 더 타면 남편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며 공항으로 데려갔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몰라도 무사히 심사대를 통과해 비행기에 탔다. 한 시간 남짓 지나자 비행기가 착륙했다. 그곳은 중국이 아닌 인천공항이었다. 최 씨는 한국으로 오는 줄도 몰랐다.
“그땐 남편이 한국으로 오라고 했으면 안 갔을 것 같아요. 북한에 있는 부모 형제 안위가 걱정돼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남편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고, 중국에 좀 있다가 돈을 갖고 북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내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국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죠.”
최 씨가 두만강을 넘어 한국까지 도착한 기간은 단 사흘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렇게 빨리, 아무 고생 없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누구나 그랬듯이 최 씨도 조사를 받고 하나원에 갔다. 한국까지 온 것은 본인 뜻이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한국에서 잘 정착하고자 결심했다.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연구원 시절인 2011년 최영실 씨가 북한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 전혀 다른 한국 생활
2001년 3월 최 씨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한 임대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한국 아파트 생활은 북한 가정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족도가 높았다.
북한에선 한겨울에 물을 길러 새벽부터 다녔는데 여기선 항상 더운물이 콸콸 쏟아졌고, 언제든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집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북한에서처럼 땔감 걱정, 전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밸브만 돌리면 새파란 불이 올라와 음식을 만들 수 있고, 입식 부엌이 아니어서 더 좋았다. 밖에 나가면 슈퍼마켓이 있어 언제라도 쌀이든 부식물이든 살 수 있고 심지어 겨울에 과일도 살 수 있었다.
그가 왔을 당시 국내 입국 탈북민은 1000명 남짓에 불과했다. 특히 북한에서 교사를 하다가 온 탈북민은 희소했다. 그 덕분에 최 씨는 통일교육원 소속 강사로 위촉돼 경찰청, 국정원, 각급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북한 실상을 증언했다.
몇 년 동안 위촉 전문 강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를 알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도 점점 안정돼 행복감은 커졌다. 하지만 북한 관련 강의를 가서 질의응답 시간에 고난도 질문을 받으면 “여기 사람들은 참 많이 알고 있는데, 내 지식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대학원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2007년 이화여대 석사 과정에 입학해 2010년에 석사가 됐다. 곧바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해 2013년에 수료했다. 해가 갈수록 입국하는 탈북민도 늘어나면서 강사로 계속 살 순 없었다.
2009년 9월 그는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탈북민이 1년에 2500명을 넘자 한국교육개발원도 북한 출신 청소년 교육에 신경을 쓰기 시작해 탈북민 교육자 출신을 뽑은 것이었다.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최 씨가 북한이탈주민 적응 실태 조사 현황을 살펴보니 탈북 청소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북한 교사 출신들이 한국에서는 경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을 재교육해 탈북 청소년을 이끌어 주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는 ‘NK교사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NK교사 아카데미는 북한 교사 출신 탈북민에게 한국 교육 과정을 초급 및 심화 과정으로 나눠 1년 동안 가르친다. 교육을 마친 이들이 탈북 학생들의 방과 후 학습 지도 및 학교 적응 상담을 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울 강서구나 노원구처럼 탈북민이 밀집한 임대 아파트 주변 학교에는 탈북민 자녀들이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탈북민 학생들도 생소한 한국 학교 과정을 따라가기 힘들어한 만큼 한국 교사들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탈북 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특히 탈북민 학부형을 만나면 상담하기 난감한 상황이 많이 생겼다.
2010년 이화여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최영실 씨.
● 현장 누비는 통일전담교육사
최 씨는 교육부에 탈북민 학생이 10명 이상 있는 학교엔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를 채용하도록 정책 제언을 했다. 교육부도 그 필요성을 인정해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방과 후 탈북민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같은 북한 출신이라 탈북민 학부형들 만족도가 높았다.
탈북 학생은 한부모 가정인 경우가 많다. 또 부모도 한국 정착이 어려워서 아이들을 돌볼 경황이 없을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잘 돌봐 주는 것도 코디네이터 몫이었다.
당시 한국에 탈북민 학생이 10명 이상 다니는 22개 학교에 NK교사 아카데미 1년 과정을 마친 탈북 교사들을 선발해 보냈다. 비록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탈북 교사들이 자신의 경력을 활용하고, 탈북 청소년도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게 하는 것이 최 씨의 목표였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통일 교육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12년 탈북민 정착을 담당하는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정식 출범하면서 교육부 소속이던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남북하나재단 소속 통일전담교육사로 소속과 명칭이 바뀌었다.
최 씨는 2013년 5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나와 통일전담교육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한 노원구 용동초등학교에는 탈북민 학생이 43명이나 있었다.
탈북하면서 온갖 고생을 겪다 보니 많은 탈북민 학생이 기초 학력 부진과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보였다. 이 아이들에게 방과 후 학습과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담임선생님과 탈북민 학부형 사이 소통을 중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최 씨는 자기 일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학교 교사들에게 탈북 학생 및 가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강의를 했고, 탈북 학생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탈북 학생 개개인에게 맞춤인 교육을 통해 꿈과 끼를 키워 줘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초등학교에서 2020년 3월까지 7년 동안 일했다.
서울 노원구 용동초등학교에서 통일전담교육사로 일하던 시절의 최영실 씨.
● 통일을 내다본다면…
통일전담교육사를 그만둔 그는 탈북민 교사 출신들이 주로 가입된 법인 통일사랑교육협의회를 설립했다.
현재는 회원 100명이 넘는 비영리단체로 성장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탈북민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국방부 안보 교육 용역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약 3년간, 연 500회 이상 탈북민 강사가 군부대를 돌며 안보 교육 강의를 진행했다.
올해 35세가 된 최 씨의 아들은 ‘인서울’ 대학을 나와 현재 제주도의 한 호텔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조만간 결혼할 예정이다.
최 씨가 탈북민 교사 모임인 통일사랑교육협의회를 만든 것은 먼저 한국에 와서 정착한 교사 출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바람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은 지금도 북한에서의 경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아쉬운 대목이다.
그가 볼 땐 북한에서 수학 물리 화학 생물 같은 기초 과학을 가르쳤던 교사 중에는 수재도 꽤 많이 있다. 학교 졸업생 15% 정도만 대학 및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해 교사가 됐다는 것 자체가 인재란 의미다.
한국 교육 과정을 재교육시키면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지금까지 재교육 과정도, 임용고시 기회도 없는 게 안타깝다.
“통일이 되서 북한 교육 과정을 짧은 기간에 싹 바꾸다 보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교육자 수만 명을 갑자기 양성할 수도 없으니 북한에 있는 교사들을 재교육해서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한다면 우리 정부도 북한 출신 교육자들을 재교육해 활용하는 예행연습을 해 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는 유치원 교사 출신까지 포함해 북한 교육자 출신이 300명이 넘습니다. ‘미리 온 통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중 한 명도 자신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많은 탈북민이 한국에서 25년을 살아 온 그에게 “정착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선 운전면허를 따세요. 자격증도 가능한 많이 따야 합니다. 그래야 선택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늘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책임감과 인성입니다. 그걸 갖춘 사람들은 빨리 정착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겉돌며 삽니다.”
그의 나이 60세. 인생의 황혼에 들어섰지만 힘닿는 한 탈북민의 맏언니처럼, 엄마처럼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 탈북민 사회에서 그가 가장 남기고 싶은 삶의 흔적은 하나뿐이다.
“최영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학교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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